힘든 세월 동안 글쓰기는 이장산의 유일한 귀위가 되었다. 당시 쓴' 낫이 휘어지다',' 서포촌을 지나다' 등 문장 발표가 잇따르고 있다. 문채가 출중하기 때문에 이장산은 당산 노동일보에 의해 기자로 받아들여졌다. 1970 년 말 이장산은 군대 중 한 명의 신문병이 되어 신문담당관으로 일했다.
군 복무 8 년 후 이장산은 부대에서 전업하여 진황도 성건국으로 전입해 사무실 주임을 맡았다. 정치 기간 동안 이장산은 조직부, 개방사무소, 외자관리국, 수출입개발회사 등에서 지도직을 맡고 수도 경제무역대학에 진학하며 벼슬길에 출세하는 벼락출세도 곧 다가올 것이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윈스턴, 정치명언) (윌리엄 셰익스피어, 윈스턴, 정치명언) "199 1 년 전후로 진황도 최고의 차가 이장산의 승이 되었다. 이는 이장산이 이미 시 경제기술 개발구 외자기업관리국 국장이다."
정종상을 포기하는 것은 이장산 사업의 중대한 전환점이다. 1992 년 불혹의 나이를 넘긴 이장산은 당시' 금밥그릇' 을 과감하게 포기하고 벼슬을 버리고 혼자 선전에 왔고, 선전 당시 첫 상장회사인 김다사에서 일하며 이장산의 상업적 이상로를 향해 나아갔다.
심천에 처음 도착했을 때 날씨가 더워서 수박을 살 돈도 넉넉하지 못하자 사무실에 가서 물을 마셔야 했다. 진황도 최고의 마운트에서 배고픈 상태까지 걸어서 출퇴근하고, 편안하고 넓은 방에서 전 재산까지 냉석 한 장, 슬리퍼 한 켤레, 세숫대야 한 켤레, 이창산은 이렇게 용감하게 도전하고, 결국 성공으로 향한다.
1966 년 문화대혁명에서 1976 년 당산대지진, 80 년대 개혁개방과 90 년대 퇴관 하해, 진황도에서 선전까지, 다시 북경으로 돌아가 30 여 년의 인생 소중한 경험을 쌓으며 이장산의 끈기와 집념을 만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