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떤 사람은 박정희를 찬탈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박정희를 독재자라고 하고, 어떤 사람은 박정희를 기적의 일꾼이라고 합니다. 내 생각으로는 실용적인 사람을 칭찬하는 편이다. 박정희의 장점과 단점은 최소한 70~30%, 심지어 80~20%는 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비록 실수도 했지만 그는 남한에서 집권한 18년 동안 남한의 경제발전과 민생향상, 자립에 지울 수 없는 기초적이고 선구적인 공헌을 했습니다.
1962년 3월 24일 윤보선이 물러난 후, 박정희는 군사력과 정치력을 바탕으로 대통령 권한대행이 됐고, 1963년 공식적으로 대통령에 취임해 재임 때까지 대한민국을 통치했다. 1979년 10월 26일 암살. 나는 여기서 그의 업적에 대해서만 말하는 것이 아니라 그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그의 비양심적인 수단에 대해서도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한국의 대통령으로서 유능합니다.
박정희는 1917년 11월 14일 북한 경상북도 선산군 구미면 모사구동(현 구미시)에서 쇠퇴하는 관가에서 태어났다. 나는 어려서부터 교양 과목은 뛰어났으나 체육 과목은 서툴렀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그는 학비가 저렴한 사범학교에만 다닐 수 있었다. 1937년 졸업 후 박정희는 경상북도 문경보통학교에서 교편을 잡았다. 하지만 그가 원하는 삶은 출세하고 유명해지는 것이 아니다.
그에게 군대 입대는 선택이 됐다. 1939년에 박정희는 일본이 우리나라 동북부에 세운 꼭두각시국에 들어가 이듬해 신징군 장교학교에 입학해 '다카기 마사오'라는 일본 이름을 받고 1등으로 졸업했다. 푸이의 금시계. 그는 도쿄에 있는 일본육군사관학교에 추천되어 학사학위를 취득했습니다. 박정희는 1944년 일본군 부사관학교를 3등으로 졸업하고 치치하얼관동군 635부대에 훈련장교로 배속됐다. 그 과정에서 그는 자신의 충성심을 보여주기 위해 일본인에게 피비린내 나는 편지를 쓰기까지 했고, 이는 그의 삶에 오점이 되었다.
박정희는 1년 넘게 일본군을 위해 노력한 끝에 1945년 7월 1일 소위에서 중위로 승진했다. 그러나 8월 15일 제2차 세계대전이 끝났고 일본의 항복 명령이 내려졌다. 한국인 일본 태생의 중위는 끊임없이 공황에 빠졌습니다. 그는 반역자로 청산되는 것을 두려워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해결책을 생각하고 광복군으로 전향하여 귀국한 후 1946년 9월 24일 북한 호위병사학교 생도가 되었다. 이 기간 동안 그의 형은 이승만의 '반역적 통치'에 반대하는 저항운동에 가담했다는 이유로 체포되어 총살되었다. 미국인에 대한 증오의 씨앗이 박정희의 마음에 심어졌고, 그와 이승만 및 다른 사람들 사이의 차이점이 드러났습니다. 그는 결코 미국인의 하수인이 되고 싶지 않았습니다.
박정희는 1946년 졸업 후 국방경비대 소위가 됐고, 뛰어난 직업적 능력으로 단숨에 대위로 진급했다. 동시에 그는 미국에 의지하기를 꺼리는 북측의 김일성 세력과 적극적으로 접촉하고, 비밀리에 노동당(현재 북한의 공산당 집권당)에 가입하려고 했다. 그러나 그의 입당 동기는 단지 형의 복수를 위한 것뿐이었고, 결국 그는 '만인은 평등하다'는 공산주의 이념에 동의하지 않았으니 어찌됐든 주인이라 할 수 있는 '똑똑한 사람'이었다. 그가 어느 시대에 있었는지. 이 기간 동안 이승만은 대규모 노동당원 수색을 단행했다(1927년 장개석의 4·12 상하이 반혁명 쿠데타도 발각돼 처형될 뻔했지만 구해냈다.) 동료를 배신하고 대판사에게 구걸하여 목숨을 끊은 것입니다.
박정희는 1949년 국정원에 입사해 보고서 작성에 능했고 중국의 북한 파병을 성공적으로 예측했기 때문에 박정희는 1949년 대열에 올랐다. 1960년 12월에는 제2군 부사령관으로 진급했다. 점차 권력의 정점에 도달한 박정희는 자신만의 방식으로 대한민국을 미국으로부터 구하고 싶어하기 시작했다. 1961년 5월 16일, 박정희는 군사 쿠데타를 일으켜 권력을 장악했다.
일련의 투쟁 끝에 박정희는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이 되어 군사권과 정치권력을 맡게 되었고 중앙정부 수립에서도 미국의 선례를 따랐다. 실제로는 자신의 통치를 유지하기 위한 비밀정보기관이었던 정보부. 1963년 박정희 대통령은 군복을 벗고 대통령으로서 정식 권력을 행사하며 대한민국의 변화를 시작했다.
첫째는 적극적으로 미국에 대한 의존성을 탈피하고 독일, 일본, 대만과의 관계를 발전시켜 국제적 지위를 추구하는 것이다.
두 번째 단계는 투자유치, 인력 해외파견, 외화벌이, 경제특구 설치, 전자부흥 구축, 중화학공업 투자, 고속철도 건설 등 수출지향 경제발전 전략을 수립하는 것이다. 신농촌 개발, 식량자급의 적극적 실현 등 마지막으로 부패 척결, 한자 폐지, 문예 개혁, 교육 개혁 등 국가 거버넌스 측면이 있다. 한국의 1인당 국내총생산(GDP)은 1960년 82달러에서 1980년 1,592달러로 20배 가까이 늘었다. '한강의 기적''. 더 중요한 것은 이 과정이 미국인의 힘에 거의 의존하지 않았으며 주로 자립에 의존하고 다른 나라의 도움을 구했다는 것입니다.
1979년 10월 26일 김재규 중앙정보부 장관은 “야수 기분으로” 연회 도중 박정희를 총으로 쏴 죽였다고 주장했다. '공식' 성명에 따르면 박정희의 '독재와 폭정'이 국민적 불만을 불러일으키고 '학생운동'을 잔혹하게 탄압했기 때문이다. 이것은 너무나 친숙한 미국의 일상이다. 내가 더욱 믿고 싶은 것은 박정희의 노력으로 한국 경제가 비약적으로 발전했다는 것이다. 미국에 대한 의존(주로 국방)을 완전히 없애기 위해 박정희는 비밀리에 결단을 내린 것이다. 핵무기를 개발하면 한국은 더 이상 미국의 수비대를 보호할 필요가 없게 됩니다. 이는 미국인들이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며 동아시아에 대한 미국의 이익에 큰 피해를 줄 것입니다. 그러므로 박정희는 죽어야 합니다.
오늘날 한국 사람들은 특히 1997년 아시아 금융 위기 이후를 되돌아보면 박정희가 결점보다 장점이 더 컸던 행동가였다는 것을 깨닫게 됩니다. 그는 박정희 시대에 박정희의 딸 박근혜를 대한민국의 대통령으로 선출하는 데 직접적으로 기여한 박정희를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박정희의 죽음으로 한국인들이 조국의 운명을 좌지우지할 수 있는 기회는 완전히 사라졌다. 스스로를 방어할 능력이 없는 대한민국은 식민지에 불과하다. 미국 경제가 아무리 발전해도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