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은 승리국이지만 공업능력이 약해 미국과 유럽 공업의 타격을 견디지 못한다. 제 1 차 세계 대전이 끝났을 때, 영국, 프랑스, 독일 등의 국가 경제는 아직 회복되지 않았다. 일본은 미국 공업의 대량의 주문서를 받았고, 실크 제품과 선박이 대량으로 미국에 수출되어 경제가 한때 번영했다. 하지만 그 후 유럽과 미국의 상품이 일본과 아시아 시장에 몰리면서 일본 상품이 계속 하락하면서 전례 없는 심각한 경제 위기를 초래했다. 1920 부터 192 1 까지 일본 공업 총생산량은 19.9% 감소했다. 이 중 조선 88.2%, 광업 55.9 주요 공산품 가격이 55 ~ 82% 하락했다. 수출은 40.3% 하락했고 국제수지 적자는 3 억 5000 만 엔, 외환보유액은 65 억 43803 억 엔에서 6 억 엔으로 줄었다. 실제로 일본의 국제경쟁력 부족으로 일본의 무역적자는 1920 부터 1929 까지 33 억 엔에 달했다. 농업도 살아남지 못했다. 3,500 개의 실크 공장이 휴업하여 2 백만 잠농이 궁지에 빠졌다. 동시에 대량의 값싼 국제 식량이 일본에 수입되고, 국내 시장이 침체되고, 식량 가격이 거듭 하락했다. 이후 쌀과 밀 생산은 장기간 정체되고 있다. 1923, 1 년 9 월 일본에서 관동대지진이 발생해 도쿄와 요코하마 대부분의 건물이 파괴돼 100 억원의 막대한 재산 피해가 불황에 빠진 일본 경제를 더욱 악화시켰다. 지진이 발생한 후 1923 부터 1927 까지 일본 정부는 미국과 영국에서 막대한 외채를 빌려 최대 9 1 억 달러에 달했다. 채무와 전쟁에서 얻은 비축에 힘입어 일본 정부는 국내 각 주요 재단에 6543.8+0 억 3000 만 엔에 달하는 구제대출을 지급해 일본 경제를 불황에서 벗어나 완만한 발전기로 접어들게 했다. 하지만 1927 일본에서 금융위기가 발생했다. 일부 은행들은 정리되지 않은 지진 재해 청구서를 많이 가지고 있어 착착 추세를 보이고 있다. 경제 위기와 불황이 잇달아 닥치다. 정부는 6543.8+02 억 엔을 배정해 미쓰비시 등 은행을 구조했다. 일본은 아직 숨을 쉴 겨를이 없어 더 큰 위기가 미국에서 터졌다. 이 과정은 두 가지 광범위한 결과를 낳았다. 첫째, 거액의 국제 채무를 빚지고 대공황을 일으키는 국제 채무 사슬의 중요한 부분이 되었다. 둘째, 대량의 중소기업이 파산하고, 일본 공업은 고도의 독점을 하고 있다. 독점재단이 통제하는 일본 경제는 한편으로 기술 갱신을 강요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무역 보호를 실시한다. 더 중요한 것은, 그것은 빚을 청산하고 군국주의를 실시하는 정치력의 진일보한 성장을 조장했다는 것이다. 이런 관점에서 관동대지진은 1 차 세계대전의 패배가 독일에 미치는 중요성 못지않게 중요하다. 독일과 일본의 거액의 채무는 미국의 번영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극도로 불균형한 번영은 매우 심상치 않은 위기를 낳았다. 단 3 년의 투자 열풍을 거쳐 1927 부터 독일의 공업 위기는 이미 규모를 갖추기 시작했다. 무거운 채무와 배상금 지급으로 인해 독일의 국내 시장은 좁고 거대한 신규 생산능력은 고속 수출 성장에서 이뤄져야 한다. 미국, 영국, 프랑스 등은 독일 배상을 요구할 뿐만 아니라 독일 공산품 수입을 거부해 독일의 거액의 투자이익을 실현할 수 없게 했다. 1929 년 3 월 영국인 배시 경은 전국무역회의에서 "우리는 세계 유례없는 최악의 금융위기의 위협을 받고 있다" 고 경고했다. 우리가 이 위기에 직면한 것은 세계 많은 정부가 무역제한 조치를 취했기 때문에 채무국이 빚을 갚을 힘이 없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금융 붕괴를 막을 수 없다. 그 대출국들의 돈은 돌려받을 수 없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