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나라 무제 9년 6월 넷째 날, 진나라 왕 이세민은 서문문 사건을 일으켜 황태자 이청건과 제나라 왕 이연지를 죽이고 자신이 왕위에 오르는 길에 가장 큰 장애물을 완전히 제거했습니다. 리시민의 힘과 무자비함은 당고조-당가오주에게 용기를 주었습니다. 자신의 시대가 끝나가고 있음을 깨달은 당고종은 일찍 퇴위를 선언하고 왕위를 이세민에게 넘겨주어야 했습니다. 당태종의 시대가 시작되었습니다. 사람들의 마음속에 이세민은 항상 백성들의 지지를 받는 훌륭한 황제였지만, 승계 초기의 실제 상황은 그렇지 않았습니다. 서안무문부터 정관 원년 12월까지 이시민의 기반은 불안정했고 당 왕조는 혼란스러운 상태였습니다. 여의, 장릉왕 이여량, 요주의 암살자 이애, 리주의 암살자 이소창 등이 연이어 살해되었는데, 그 중 가장 대표적인 인물은 여의였습니다. 노비는 명문가 출신으로 아버지는 수나라의 장군이었습니다. 성인이 된 여의는 수나라 군대의 장군이 되어 주군현에 주둔한 우군장군 이징의 휘하에서 전사 군단의 사령관으로 근무했습니다. 여의는 힘이 세고 전투에 능한 장군이었습니다. 그러나 노의의 성격은 길들여지지 않은 교활한 기질로 쉽게 화를 내는 등 좋지 않았습니다. 전투 능력이 뛰어난 것으로 알려진 노비는 요주의 군사 지역을 장악하여 모든 정파의 경쟁 대상이 되었습니다. 수나라의 군벌 유문화와 하북성의 반란군 도건덕, 북평현 왕 고개파도가 여러 차례 사자를 보내 설득했지만 모두 거절당했습니다. 여의는 이미 한 가지 생각이 있었습니다. 그는 관중을 점령한 당고조 유방이 진정한 천자라고 판단하고 무제 3년, 당나라에 항복했습니다. 당 고조-당 고조는 그를 높이 평가하여 그를 연준왕으로 삼고 여전히 요주에 주둔하게 했습니다. 당나라 건국 전쟁에서 여의는 당나라 군대와 싸우기 위해 여러 차례 출정하여 허베이성 유하수 전투를 진정시키고 북쪽의 투르크 군대의 침입을 막는 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당시 황태자 리와 진의 왕은 그 자리를 놓고 경쟁하고 있었고, 양쪽 모두 당나라의 장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최선을 다하고 있었습니다. 많은 고민 끝에 여의는 리 왕세자가 자신에게 필요한 지원을 받고 있고 장차 왕위를 물려받을 수 있다고 판단하여 결국 리 왕세자에게 투자하기로 결정했습니다. 이 선택은 훗날 비극적인 최후의 씨앗을 뿌린 것이기도 합니다. 황태자에게 충성심을 보이기 위해 여의는 진나라 이사를 일부러 소외시켰습니다. 한번은 이시민이 사자를 보내 노이의 군사 진영 중 한 곳에 근무하도록 했습니다. 노의는 그의 말을 듣지 않았을 뿐만 아니라 부하들에게 "이유 없이 때려 죽이라"고 명령하고 이시민의 사자를 구타했습니다. 당고조(唐高祖)는 매우 화가 나서 노의를 투옥하라고 명령했습니다. 그러나 노의는 당시 싸움이 잦았던 북쪽 국경에서 명성이 자자했던 인재였기 때문에 처벌을 받지 않았습니다. 이때 한 사기꾼의 등장으로 노의는 마침내 반란을 결심하게 됩니다. 맹시라는 여인은 과거와 미래를 안다고 주장했습니다. 당시 그녀는 너무 유명해서 당고조-당고조조차도 그녀를 수도로 소환한 적이 있었습니다. 이 몬테소리는 신비한 사기꾼이었습니다. 그녀는 한때 노이의 아내에게 "고귀한 여인, 그녀는 천하의 어머니가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고 노이에게 "계왕이 여자가 될 것이며 열흘 안에 관직으로 승진할 것이다"라고 말했습니다. 따라서 뤄이는 애초에 리를 위해 잘못된 직책을 선택했고 이제 그는 사기꾼의 말도 안되는 말을 듣습니다. 이 두 가지 요인이 합쳐져 마침내 여의는 이사가 왕위에 오른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전관 원년, 가장 먼저 뻔뻔스럽게 반역하여 큰 실수를 저지른 반역자가되었습니다. 하지만 그 무렵에는 천하가 안정되었고 사람들은 생각할 것이 있었기 때문에 아무도 그를 따르지 않았습니다. 결국 노비는 추종자들을 버리고 병사들이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노의는 혼란 속에서 죽임을 당했고, 이세민이 왕위에 오른 후 살해된 최초의 건국 재상이 되었습니다. 비록 자결한 것이지만 정말 안타까운 일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