선생님' 이라는 호칭은 원래 덕망이 높은 남성을 가리켰지만 민국시대에 큰 변화가 일어났는데, 아마도 서구 문화와 신문화 운동의 영향으로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사회에 진출하기 시작했고, 여권의식이 중국에서 각성하기 시작했기 때문일 것이다. 점점 더 많은 여성들이 배우고 사회로 나아가기 시작했다. 덕망이 높은 여성들은 모두 송경령씨, 빙심씨, 강양씨라고 불린다.
강양은 베이징에서 태어나 신해혁명이 발발한 이래 줄곧 떠돌아다니는 생활을 하고 있다. 부모님과 항주에 정착할 때까지 나는 안정되어 그곳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다. 나중에 나는 언니를 따라 상해에 가서 책을 읽었고, 그 때 나는 천천히 시야를 넓히기 시작했다.
내가 공부하는 동안 가장 가고 싶은 대학은 칭화인데, 아쉽게도 칭화는 실패하여 소주의 동오대학교에 직접 갔다. 이후 그는 우수한 성적으로 칭화대에 재입학해 해당 대학의 외국어 대학원생이 되어 칭화대에서 공부 생활을 시작했다. 새로운 사상을 받아들이는 강양이 얼마 지나지 않아 유학 열풍을 일으킨 것도 계기다. 당시 그녀의 남편이 된 전종서 처럼, 그녀는 영국으로 유학을 갔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파리 대학으로 전학을 갔다.
바로 그 유학 기간 동안 강양은 각종 문학에 흥미를 느꼈고, 귀국한 후 대량의 극본과 문학 작품을 썼고, 점차 당시 문단에서 어느 정도의 명성을 얻었고, 결국 한 세대의 문학가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