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명양의 본명은 왕수인(王守仁, 1472년 10월 31일 ~ 1529년 1월 9일), 한국적은 윤, 예명은 보안, 별명은 양명이다. 그는 한때 회계산 양명굴에 집을 지었기 때문에 학자들은 그를 양명씨라 부르기도 하고 왕양명이라고도 불렀다.
명나라의 유명한 사상가, 작가, 철학자, 군사 전략가로 루왕(魯王) 철학의 대가였으며 유교, 도교, 불교에 능통했다. 홍지 12년(1499)에 법무장관, 귀주성 용창이성, 여릉부사, 우건도 검열, 장시성 남부 관찰사, 광동성, 광서성 관찰사를 역임했다. 말년에는 난징 전쟁부 상수(Shangshu)와 메트로폴리탄 검찰원의 주오위안(Zuoyuan)을 역임했습니다. Chenhao 반란을 진압하기 위한 군 복무로 그는 Xinjian Bo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Longqing 기간 동안 그는 사후에 Xinjian Marquis라는 칭호를 받았습니다. 문성(文成)이라는 시호를 받았으므로 후세에도 문성공(文成工)이라 불렀다.
왕수인(마음의 대가), 공자(유교의 창시자), 맹자(유교의 대가), 주희(성리학의 대가)를 통칭하여 공자라고 하는데, 맹자, 주, 왕.
왕수인의 학설과 사상 <왕설>(양명학)은 명나라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철학사상이었다. 그의 학문적 사고는 중국, 일본, 한반도 및 동남아시아로 퍼져 그의 도덕적 인격과 명성을 확립했으며 그의 업적은 명나라에서 유례가 없습니다. 그에게는 제자가 너무 많아 야오장(姚江)학파로 알려졌습니다. 그의 글은 넓고 심오하며, 그의 글에는 상쾌한 기운이 있습니다.